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125·끝-지극한 해병대 사랑



베리아 상륙작전

월남전 기간 중 한미 해병대의 대규모 연합 상륙작전이 실시돼 베리아 반도 일대의 양민 2000여 명을 해방시켰다. 1969년 9월 5일부터 30일까지 수행된 이 작전은 규모나 전투의 치열함에서 인천에 비교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두 나라 해병대가 오랜만에 호흡을 맞춰 치밀하게 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인천 이래의 전통과 우정을 세계에 과시했다.다낭에서 30㎞ 떨어진 베리아 반도는 천연의 요새다.

반도 북쪽에 은거지를 둔 월맹군과 지방 게릴라들이 호이안과 다낭의 아군 군사시설을 위협해 우군의 작전활동에 큰 제약이 됐다.이곳은 원래 미 기갑사단의 전술책임지역이었다.

그래서 미 해병대가 두 차례 상륙작전을 벌여 평정했으나 상륙부대가 철수하면 다시 게릴라 세상이 되곤 했다. 아예 싹을 도려내자는 논의가 한미 해병대 연합 상륙작전으로 발전했다.

작전에 참여한 부대는 청룡부대 제2·3·5대대와 포병대대, 그리고 미 해병 LVT 중대였다. 연합전력은 미 해병1사단, 제1비행사단, 월남군 제51연대, 미7함대 소속 전대였다.

반도 북부는 한국군, 남부는 미군이 맡아 일주일간의 1단계 작전과 열흘간의 2단계작전으로 나눠 수행됐다. 청룡은 9월 2일부터 베리아 반도 서쪽을 강타한 우군의 함포지원과 포병지원이 끝난 뒤 네 차례의 상륙전과 공수착륙전이 수행됐다.

첫 공격은 5일 아침 9시부터 해상 돌격부대와 헬기를 이용한 수직 돌격부대에 의해 반도 북부에서 시작됐다. 지정된 차단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북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수색전과 매복전을 반복했다.

7일 아침에도 마찬가지로 2개 중대는 해상으로, 2개 중대는 공중으로 투입돼 차단 임무수행을 위한 탐색전을 벌였다. 1단계 최종 단계에 접어든 10, 11일에는 오수돈 중령의 5대대와 유동욱 중령의 2대대 상륙단이 미 해군 함정에 승선해 함상훈련을 실시하면서 목표지점으로 항진했다.

이날은 항공기를 이용해 양민들의 피란을 권유하고 적병들의 투항을 권고하는 전단을 살포하는 심리전을 병행, 2000여 명의 피란민을 안전지대로 철수시켰다.2단계 작전 첫날인 12일 본격적인 상륙전이 시작됐다. 기함 이오지마 함에 승선하고 있던 5대대 상륙단이 공수돌격을 감행함으로써 서막이 열리자, LVT에 분승한 2대대 상륙단이 적색 해안으로 상륙돌격을 감행함으로써 작전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5대대 돌격상륙단 김영일 중사는 참전기를 통해 “작전 중 베트콩의 저격탄(스나이핑)이 빗발치는 가운데 평소 훈련받은 대로 침착하게 작전을 수행해 중대원의 단 한 사람도 피해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7함대 함정의 함포지원 아래 적색 해안에 상륙할 때는 아침 노을을 배경으로 한 고기잡이 배들이 항공모함 주변에 떠 있어 낭만적인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격상륙 후 뜨거운 모래사장과 우거진 밀림을 헤쳐가면서 전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머리 위로 적탄이 빗발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밀림 속에서 베트콩의 동굴을 발견하면 수류탄 공격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D + 3일 11시 40분 첨병분대장 김동호 하사가 발견한 동굴은 이상했다.

입구가 H자 형으로 생긴 이 동굴은 폭은 넓었으나 길이가 짧았다. 탐색조가 동굴 안에서 노획한 비닐 보따리에서는 카빈 소총과 함께 한글로 된 전단 20장이 들어 있었다. 청룡을 상대로 심리전을 하려는 것이었을까. 그 전단의 용도는 알 수 없었지만 이국의 적진에서 노획한 한글 문서는 기억에 또렷하다고 그는 회상했다.

통신병은 자고 있나

70년 12월 21일 월남에 파병된 김해룡 하사는 71년 1월 제1대대 제2중대 특공분대장 보직을 받았다. 다낭 남쪽 디엠반에 있는 부대였다.김하사 분대원은 20명이었다. 해병대 분대 편제는 원래 육군보다 인원이 많다. 월남전 때는 미 항공함포연락중대(ANGLIGO) 요원 3명과 전방관측 요원 2명이 배속돼 당시 육군 편제의 2배가 넘었다.

책임전술 지역을 가진 각 중대는 소대마다 특공분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중대 진지 입구에서부터 1번 국도에 이르는 도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밤낮으로 매복작전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급로도 확보하고 적정을 탐지해 공격의 예봉을 꺾기 위한 조치였다.

월남전이 지루한 탐색전 양상으로 변한 그 무렵 청룡 병사들도 매너리즘에 빠져 매복 진지를 이탈해 나무그늘 아래서 더위를 식히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가 근무시간이 끝나면 먹기 싫다고 레이션을 버리고, 실탄도 흘리고 돌아가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수류탄까지 숙영지에 떨어뜨리고 갔다.

그것들은 고스란히 베트콩의 보급품으로 이용됐다. 그렇게 입수한 무기로 청룡을 기습해 큰 피해가 났다. 김하사는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안 돼 특공분대장이 됐다.71년 1월 31일 야간 매복작전을 나가면서 그는 근무수칙을 강조했다. 야간작전에서는 방음(防音)·방광(防光)이 만고의 철칙이며 세수하지 말고, 이를 닦지 말고, 마늘·김치 같은 냄새나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잔소리도 배운 그대로였다.

그날은 그믐밤이었다. 다행히 적의 예상 접근로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밤이 그리 깊지 않아 월남인 특유의 체취가 실바람에 실려 왔다. 베트콩 내습을 알아챈 김하사는 상황 설렁줄을 한 번 당겼는데 이내 적정(敵情)이 사라졌다. 무언가 낌새를 챈 것 같았다.주변을 돌아보니 옆에 있는 통신병의 무전기 안테나 끝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반짝였다.

베트콩들은 그것을 보고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안테나 끝 피복이 벗겨지면 흙을 바르거나 덮개를 씌워 빛의 반사를 막는 것이 월남전의 상식인데, 통신병이 그걸 소홀히 한 것이다.그렇다고 철수할 수도 없는 일,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매복조를 포위한 베트콩들이 공격을 가해 왔다. 김하사는 일절 응사하지 말라고 했다.

개인호 안에 죽은 듯이 있으면 상황이 끝난 것으로 알고 적이 접근해 올 것이다.예측은 적중했다. 베트콩들이 어둠 속에 몸을 드러내고 접근해 올 때 김하사는 힘차게 설렁줄을 당기면서 크레모아 지뢰 스위치를 눌렀다. “꽝, 꽝” 하는 연쇄 폭음을 신호로 특공대원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뜻밖으로 상황은 일찍 종료됐다.

총성이 멎은 지 5분쯤 지나 김하사는 좌우의 사정 파악을 마치고 옆에 있는 통신병을 불렀다. 통신병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통신병, 너 자고 있나?”김하사는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울 수가 없어 직접 통신기 핸드셋을 들어 중대본부에 간략한 상황보고를 했다. 지금 위치에서 날이 새는 대로 전과를 보고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날이 밝아 김하사는 전과 확인에 나섰다.

적의 시체 4구가 발견됐고, 여기저기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김하사는 통신병에게 전과보고를 지시하려고 또 불렀다. 그러나 그는 아까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를 흔들어 깨워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이마에 적탄이 관통한 것을 그제야 보았다.김하사는 다시 무전기를 잡고 “적 사살 4명, 아군 전사 1명”이라고 전과를 정정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감기지 않은 부하의 눈꺼풀을 덮어주었다.

에필로그-어느 한 순간도 해병대 떠난적 없어

6·25전쟁과 월남전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황망하게 연재를 끝내게 됐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온통 전쟁과 전투에 관련한것뿐이어서 독자들에게 미안하다. 전쟁 때문에 존재하는 군대가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월남전이 한창이던 1966년 6월, 나는 제6대 해병대사령관 임기를 무난히 마치고 20여 년 동안 몸담았던 군문을 떠났다.

정든 해병대를 떠난다는 것은 정말 아쉬웠지만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곳이었으니 도리 없는 일이었다.아직 창창한 40대 중반, 그냥 무위도식할 나이는 아니었다. 전역 이듬해인 67년 고향인 지역구 밀양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5년 동안 나랏일도 해 보았고, 재향군인회 일에도 참여한 바 있다.

군문을 떠난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내 사고의 중심에는 언제나 해병대가 자리 잡고 있다. 한 순간도 해병대에 관한 일이 내 뇌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 해병대가 잘 나가면 괜히 기분이 좋았고, 불상사가 있으면 내 일같이 가슴이 아팠다. 내 아들 셋과 손자 둘을 해병대에 보낸 것도 ‘지극한 해병대 사랑’의 결과였다.

그런 나에게 가장 큰 마음의 상처로 남은 일이 있었다. 해병대사령부 해체가 그것이었다. 73년 10월 10일 해병대사령부가 없어져 우리 해병대는 머리 없는 생명체가 됐다. 해병대라는 군대는 그대로 있는데, 사령부라는 지휘부가 해체돼 해군에게 통합 귀속됐다. 해병대를 직접 지휘함으로써 해상작전을 책임지는 해군참모총장에게 지상작전까지 책임지라는, 과중한 부담을 주는 기현상이 초래됐다.

그 시기가 사령관 재임 중 월남전 선봉부대로 보낸 청룡부대 철수시기와 겹쳐 해병대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아쉬울 때는 앞장세워 이용하더니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었다. “토사구팽도 유만부동이지, 누구 때문에 거사에 성공했는데 이렇게 갚는 거야!”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하는 말들이 횡행했다.

모임에 가서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새로운 군사정권이 들어섰다.머리 없는 해병대는 14년간 존속되다가 87년 11월에 원상회복됐다. 두 차례의 군사정권이 끝나고 민주화 시대를 맞아 사령부 부활의 비원을 이루었을 때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아직까지 해체 전의 사령부 기능 및 위상이 복원되지 못해 매우 안타깝다.나는 참 많은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 찬 가슴을 안고 ‘남기고 싶은 그때 그 이야기’를 마친다. 나는 개인적인 일에 국한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해병대 전체의 경험과 관심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함으로써 후세 해병들에게 1세대 해병의 전통과 문화를 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글을 썼다.

혹시 사실과 다르거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실 인식이 있었다면 노력과 수양 부족으로 탓해 주기 바란다.그리고 집필에 많은 도움을 준 해군본부와 해병대사령부, 많은 선후배와 동료들에게 깊은 사의를 표한다. 자료정리와 수정에 많은 도움을 준 문창재 언론인을 비롯해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 준 모든 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사랑하는 내 조국과 해군·해병대를 위해 봉사하고 몸을 던져 충성할 수 있도록, 이 시대에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준 하느님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기회를 마련해 준 국방일보와 그동안 열띤 반응을 보여준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내가 본 인간 공정식 문창재 언론인-“知德勇 겸비한 타고난 무인이었다”

장수는 용기와 지혜를 다 갖춰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이지 실제이기 어렵다. 거기에 덕까지 갖춘다는 것은 이상일 것이다. 그런 사람을 바라는 마음에서 욕심을 내는 것일 뿐, 현실 세계에서는 흔하지 않다.거기에 근접한 사람을 만나본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감히 이 회고록의 주인공인 공정식 제6대 해병대사령관을 그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와 매주 한 번씩 만나 옛날 얘기를 들으면서, 어떤 지휘관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가 있을까, 감탄하고 감동했다. 마음속으로는 지덕용(知德勇)을 다 갖추고 싶어도 두려워서, 귀찮아서, 졸려서, 배고파서, 등등 수많은 이유로 그러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살을 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허기가 지나쳐 헛것이 보이는 산악 전선의 상황이라 해도, 지휘관은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병사들보다 덜 춥게 잘 수 있고, 허기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군대생활에서 겪은 많은 지휘관이 그랬다. 그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몸에 붙이고 휴대하는 모든 것이 병사들의 그것과 달랐다. 누구나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장교니까, 지휘관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러면서도 존경하지는 않았다.

공정식 사령관은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그 오랜 전투기간을 최일선에서 지내면서, 병사들과 같은 것을 먹고, 똑같은 텐트 잠을 잤고, 병사들이 걸을 때 같이 걸었다고 했다. 적에게 포위당해 8박9일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걸어 탈출한 극한상황에서도 그는 그랬다.나는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 지위가 높다고 병사들보다 나은 것을 원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존경한다.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다 잡힌 병사를 설득한 그의 리더십은 너무 인간적인 드라마였다. 전선에서 무단이탈이 어떤 죄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는 책하지 않고 타일렀다. “사실은 나도 무섭다. 너처럼 도망치고 싶지만, 해병이기에 참고 견디는 것뿐이다.”병사는 벌떡 일어나 “해병을 위해 용감히 싸우겠습니다” 하고 진지로 돌아갔다.

어떤 처벌이나 훈계보다 인간적인 말 한 마디가 도망병 마음을 산 감동 드라마다.그는 해군사관학교 1기 출신이다. 보기에도 멋진 하얀 정복에, 선글라스를 끼고 함대를 지휘하는 제독의 길이 보장돼 있었다. 그의 동기생 가운데서 해군참모총장이 넷이나 배출됐다. 그런데 그는 험난한 해병대의 길을 지원했다. 적진의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상륙작전에 앞장서서 돌격하는 위험한 군대를 스스로 찾아들었다.

해병대는 해군에서 파생된 군대다. 초창기에는 규모도 적고 세간에 알려지지도 않은 무명의 군대였다. 따라서 보급과 갖가지 지원이 해군보다 열악하고, 출세의 기회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높은 곳, 더 나은 곳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 남다른 생각과 용기를 가진 ‘타고난 무인’이었다.

8개월 동안 그를 인터뷰하면서 아직도 현역처럼 해병대 일에 애착을 갖고 있음을 보고 놀랐다. 크고 작은 해병대의 행사나 모임에 그는 노구를 이끌고 자주 나간다.그냥 대선배 자리 하나를 메우는 정도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일이 결정되면 앞장서서 밀고 나간다. 자금이 필요한 일에는 먼저 지갑을 여는 것도 보았다.

맥아더 장군 동상 지키기 농성 때는 3개월 농성 자금 상당액을 댔다고 들었다.이 이야기의 제목 밑에 ‘영원한 해병’이란 소제목을 왜 붙였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는 퇴역 해병 가운데 최고령자이지만, 가장 열성적인 ‘현역 해병’으로 보였다.

시리즈를 정독하고 해병대 63대대장 조순근 중령-“해병대의 명예·전통 이어 나갈터”

내년이면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60주년을 맞이한다. 이러한 시기에 국방일보에서 기획으로 다룬 ‘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은 우리 해병대에 특별한 의미가 됐던 글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해병대 창설 초기의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을 시작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이르기까지 해병대의 찬란한 역사 뒤에 숨어 있는 수많은 해병의 고난과 자기희생에 대한 감사함을 알고 해병대 장교로서의 내 모습에 자긍심을 갖게 했던 소중한 기회였다.

특히 공정식 전 사령관님께서 제1연대 1대대장으로 재직하시던 시절의 수많은 일화는 현재 지휘관으로 근무하는 나의 모습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해 주었다.

광복 직후 혼란과 격동의 시절에 피어난 공 전 사령관님의 조국수호에 대한 열망과 불의에 굽히지 않는 패기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계기로 1949년 4월 15일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이라는 웅대한 꿈으로 구체화했으며 결국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과 함께 인천상륙작전 직후 자신을 해병대 장교로서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게 했다.

지금도 여러 가지 면에서 타군에 비해 상대적 열세를 면하기 어려운 게 우리 해병대의 현실인데 당시에 그 어려움이야 오죽했으랴 싶은데도 공 전 사령관님께서는 오직 해병대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에서 수많은 영광의 역사를 창조했다.

이른바 ‘귀신 잡는 해병’ ‘무적 해병’으로부터 중앙청에 태극기를 다시 올리며 ‘대한민국 제2건국’을 이뤄 낸 서울탈환작전, 멀리 월남에서 용맹을 떨쳤던 ‘신화를 남긴 해병’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냈던 것이다.합참과 해병대사령부에서 해병대의 전력업무를 경험해 본 내 입장에서 당시 선배 해병 장교들의 어려움과 고뇌의 시간은 굳이 다 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6·25전쟁 기간 중 해군에서 해병대로 소속을 바꿔야 하는 어려움과 처음으로 야전 전투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 속에서도 의연히 해병대 제1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언제나 전투의 최일선에서 소총 소대원들과 동고동락하며 몸소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실천하셨다. 그러한 모습이 대대원들로부터 충성과 신뢰를 이끌어 냈고, 그것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로 돌아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도솔산 전투’다. 해병대 전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도솔산 전투는 미 해병대도 이루지 못한 임무를 한국 해병대가 승리로 이끌어 낸 전투며, 그 중심에 공정식 대대장과 휘하 대대원들이 있었다. ‘아아! 도솔산’ 도솔산 주봉에 이르기 위해 10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 했다.

전쟁의 수많은 원칙보다 오직 내 전우와 함께한다는 믿음으로 대대장을 비롯한 모든 대대원은 ‘반드시 고지를 점령해 너의 원수를 갚으리라’는 결의를 다졌다.필자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그려본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내 옆에 있는 전우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현재 해병대만의 끈끈한 전우애도 피로 이뤄 낸 선배 해병들의 혼이 깃든 이유일 것이다.

전우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기본조건임에 틀림없으나 그러한 신뢰가 어느 순간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평소부터 대대원들과 함께 먹고, 자고, 숨 쉬는 시간들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지금 나 역시 이곳 서북도서에서 대대장직을 수행하면서 똑같은 마음을 갖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결코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해병대 창설부터 월남전까지 공 전 사령관님은 해병대의 영광스러운 명예와 전통을 만드는 그 중심에 서 계셨다. 때론 5·16 등 역사의 풍랑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흔들리고 고뇌했던 시간도 있었으나 ‘군인무언(軍人無言)’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며 올바로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자에게 모든 것은 그저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풍전등화의 위기, 격랑의 시대가 다시 오면 우리 해병대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재현할 준비가 돼 있는가 자문해 보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것을 느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후배장교들도 지금 이 순간 그 역사를 지키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하고 있다.

“승자는 이길 준비를 해 놓고 싸운다”고 했다. 청룡부대 파월 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 전투부대 파병을 앞두고 한 박정희 대통령의 물음에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금 바로 출전하겠습니다”라고 답한 그것이 바로 우리 해병대다.지금 난 이곳 백령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이 글의 마침표를 찍고 있다.

그러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병대의 역사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미래에도 진행형이다. 도전과 승리의 연속이었으며, 앞으로도 해병대의 자랑스러운 명예와 전통은 나를 통해 그리고 후배들을 통해 계속될 것이다. ‘해병대 그대의 자랑이듯이, 그대 해병대의 자랑이어라!’

사진설명
①박정희 대통령이 월남전에서 한미 해병대 작전을 수행한 공로로 그린 미 해병대사령관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1966년).
②공정식(가운데) 전 해병대사령관과 작고 전 함께한 고 신현준(왼쪽) 초대 해병대사령관, 고 김성은 전 해병대사령관 모습.
③연재를 위해 지난 8개월간 호흡을 맞춘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왼쪽)과 필자.<사진=정의훈>
④해병대 63대대장 조순근 중령.

<공정식 前해병대사령관 정리=문창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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